Acephale.
2024년 Acephale 학회 4차시.
[개인의 무의식에서 집단으로 –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
박찬빈
1. 기본적 개진
나의 관심은 평생에 걸쳐 자연 과학과 의학과 심리 요법을 두루 거친 뒤에,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숙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 나를 매혹시켰던 문화적인 문제들로 돌아왔다. 1
그는 말년에 수행했던 사회학적 연구에 대해 위의 인용글처럼 표현했다. 실제로 『쾌락원칙 넘어서Beyond the plesure principle』 이후 저작들에서 그는, 치료적인 맥락의 텍스트들 보다 집단적인 이야기들, 공동체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주제에서 사회적 유대관계, 혹은 종교는 빠질 수 없었다. 실제로 그가 죽기 바로 전, 즉 1939년에 쓴 저작이 『모세와 유일신교Moses and Monotheism』인 것을 생각해보아도, 이전의 프로이트의 관심사 — 환자, 즉 개인의 치료와 이를 위한 분석 — 에서 조금 떨어져서 생각함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번 4주차에는 1915년에 쓰인 『전쟁과 죽음에 관한 고찰Thoughts for the Times on War and Death』 과 1921년 작,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을 다룬다. 『전쟁과 죽음에 관한 고찰』에서는, 당대의 사유가들이 대체로 그러한 면모를 보이듯, 전쟁으로 야만인이 되어버린 유럽 — 평화 시대의 공통 문명이라고 불렀던 지난 세기의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nica)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광범위한 환멸 — 을 보며 쓴 작품이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이전까지 상상한, '기사도'가 살아있는 전쟁과 당대의 전쟁의 차이를 보며 환멸을 느꼈고, 죽음에 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분석한다.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에서는 개인 심리학을 토대로, 집단 심리학에 접근하며, 그 예로 군대와 교회를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는 집단 속의 개인과 지도자 사이의 리비도적 유대를 말하고자 하는데, 그가 보기에 교회와 군대는 굉장히 인위적인 집단이며, 지도자 내지 그 집단의 다른 구성원과 리비도적 결합으로 묶여있고, 개인은 이러한 강렬함 감정적 유대로 집단 내에서 자유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를 개진하는 프로이트는, 시간이 지난 1930년, 『문명속의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이라는, 집단 심리학과 프로이트 후기 모두에서 중요한 저작을 발표한다. 본능의 욕구와 문명의 제약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을 다루는 이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겠다. 인간은 문명없이 살 수 없지만, 문명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 문명화된 삶은 개인에게 강요된 타협이자 본질적으로 해소불가결한 곤경이 된다. 즉, 달리말해,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자체가 불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후 — 사실은 『문명속의 불만』 이전, 『환상속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에서도 다루기는 했지만 — 프로이트는 1913년의 저작,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 내지는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종교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지만,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2. 『전쟁과 죽음에 관한 고찰Thoughts for the Times on War and Death』
우리는 전쟁을 사람들 간의 예절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우리는 전쟁을 기사도에 따른 치고받디로 상상했다. 싸움은 어느 한쪽이 우세를 확립하는 것으로 한정되고, 이 결정에 이바지 할 수 없는 격렬한 고통은 되도록 피한다. 또한 경쟁에서 물러나야 하는 부상자만이 아니라 부상자를 치료하려고 애쓰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도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 그리고 평화시의 공동 문명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국제적 사업과 제도는 모두 그대로 유지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상상한 전쟁이었다. [⋯] 그런데 우리가 믿지 않으려고 했던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것은 환멸을 가져왔다. 이번 전쟁은 평화 시에 모든 나라가 지키겠다고 약속한 국제법이라는 제약을 모조리 무시하고 있다. [⋯] 맹목적인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이 전쟁은 교전 중인 민족들간의 공통된 유대를 모조리 잘라내고,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유산으로 남기려고 한다. 이 적개심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대 관계의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1915/2022 : p.43-44.)
프로이트는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보며 적잖이 충격을 먹은 듯 하다. 이 책은 크게 두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번째 장은 우리가 집단, 내지는 국가라는 공동체에 가지고 있던 환상과 그것의 붕괴, 그리고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이번 전쟁에서는 두 가지가 우리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대내적으로는 도덕 규범의 수호자인 척하는 국가가 대외적으로는 저급한 도덕성을 보여준 것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개인들이 최고 수준에 이른 인간 문명의 참여자로서 도저히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잔인성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실이다. (1915/2022 : p.47.)
환상, 개인들이 집단에 가지고 있던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불쾌감을 맛보지 않게 하고, 그 대신 만족감을 즐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환영한다. (1915/2022 : p.46.) 먼저 첫번째 환상을 보자. 국가는 국민들에게 최대의 복종과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지나친 비밀주의와 엄격한 검열로 국민을 어린애처럼 취급한다. 검열 때문에 지성을 억제당하는 국민들의 마음은 사태가 불러게 돌아가거나, 불길한 소문이 나돌 때마다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휩쓸릴 수 밖에 없다. [⋯] 그러면 개인들은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승인해야 한다. 2 하지만 국가는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그 희생을 다른 식으로 보상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거의 입증하지 못한다. 이러한 국가, 허울뿐인 국가, 하지만 그렇기에 위대한 국가였으나, 위대한 조국은 무너지고, 공유지는 황무지로 변하고, 동포들은 분열하고 타락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이 이야기하는 이익은 3 기껏해야 열정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1915/2022 : p.56.) 이것이 먼저번의 환상이다. 두번째 환상에 대해 프로이트는 원초적 충동이 어떻게 <선>과 <악>으로 물릴 수 있는지, 그 충동으로 형성되게 하는 계기에 대해 설명한다. 그 첫번째가 바로 <본능의 변천>이라 불리는 과정이다. 인간 내부의 원초에는 사회가 악으로 비난하는 충동과 선으로 추앙하는 충동이 있다. — 다만 이 원초적 충동은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고, 모두가 비슷하며,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하는 목적을 지녔기에, 충동 자체에는 선과 악이 없다. 다만, 공동체의 욕구 및 요구에 따라 선, 악으로 분류하는 것 뿐이다. 일부 본능적 충동들은 거의 처음부터 정반대의 충동과 짝을 이루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반동 형성이 더욱 쉬워진다. 이것이 양가감정이다.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로 변하고, 잔인성이 연민으로 바뀐것 처럼 보이는, 그러한 충동의 내용을 바꾸는, 기만적인 형태를 프로이트는 반동 4 5 형성이라 부른다. 이 과정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 프로이트는 부적절하다 표현했지만 — 선과 악이라는, 성격이라는 것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내적 요인은 에로티시즘 — 가장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사랑에 대한 욕망 — 이 악한 (이기적인) 본능에 행사하는 영향력이다. <에로틱한> 요소가 혼입되면, 이기적 본능은 <사회적> 본능으로 바뀐다. 우리는 남에게 사랑받는 것을 커다란 이익으로 평가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 받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익은 기꺼이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외적 요인은 가정 교육이 행사하는 강박Zwang이다. 가정 교육은 문화적 환경의 요구를 나타내며, 성장한 뒤에는 그 환경의 직접적인 압력이 계속해서 외적 요인을 이룬다. 몇몇은 본능 만족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고, 문명 세계에 새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개인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외적 강박은 끊임없이 내적 강박으로 대치된다. 문명의 영향은 이기적 경향에 에로틱한 요소를 첨가하여, 그것을 이타적이고 사회적인 경향으로 바꾸고, 그런 변화는 계속 늘어난다. 결국 인간이 발달과정에서 느끼는 — 즉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 하나의 외적 요인에 불과했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1915/2022 : p.49.)
이 단락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 이론을 보다 개정하여, 문명과의 관계성 속에서 설명함을 알 수 있다. . 아버지의 금제라는 것에 말미암아, 어머니에 대한 사랑, 즉 첫번째 관능적 사랑이 거부되며, 자신의 욕구에 대해 금지가 발생하고, 그렇기에, 스스로의 정신 안정을 위해 현실원칙을 가정해서 — 곧 그 자체가 특성이 되며 — 초자아가 형성됨을 말했다. 이제 그 설명을 문명과 엮어, 자신의 이기적 본능 — 공동체에서 악함으로 평가되는 것 — 을 외부의 교육, 그 중 첫번째 사회 교육이 되는 가정 교육을 통해 우선적으로 그러한 본능들이 잠재우고, 이는 강박이 되며, 이러한 외적 강박이 내적강박으로, 즉 내 안으로 들어오고 대치됨을 이야기 한다. 여기서 주된 원동력이 에로티시즘인 것은, 이후 프랑스 철학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하며, 재밌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찌되었든 에로티시즘의 영향으로 이기적 충동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문화에 대한 감수성>이라 부른다 다시 국가 공동체의 입장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 집단은 이렇게 문화에 대한 감수성에 말미암아 '선한' 행동을 하는 행위자를 강요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행동을 하는 행위자가 '선'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달리말해, 문명은 그 사람의 본능적 바탕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6 사회는 도덕기준을 최대한 엄하게 잡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리하여 그 구성원들은 자신의 본능적 기질에서 한층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본능을 끊임없이 억제해야한다. 따라서 현대인의 신경병의 원인을 7 본능을 억제하기 가장 어려운 성의 영역에서 8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며, 성본능 뿐만 아니라 금지된 본능은 적당한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터져나와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9 즉, 계속된 본능의 억압, 그것도 사람들을 위선자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들로 말미암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개인들은 전쟁이라는, 도덕적 제약을 서로 폐기하는 행위로까지 나아가게 했으며, 이 도덕적 제약을 서로 폐기한 사실은 자연히 개인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개인들은 잠시나마 문명의 끊임없는 압력에서 벗어나 줄곧 억제하던 본능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켰다. 10 이것이 두번째 환상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소외감의 원인은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원인은 앞에서 말한 전쟁이고, 두 번째 원인은 죽음에 대한 종래의 태도에 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5/2022 : p.57.)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 — 우리 마음속에서도 가장 깊은 심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본능적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 은 부정적인 것을 전혀 모르고, 어떤 부정도 모른다. 무의식속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무의식은 자신의 죽음을 모른다. [⋯]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서는 죽음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대한 본능적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체 상상을 할 수 없다. 11 그렇다면 타인의 죽음은 어떠한가? 12문명인이라면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들이 듣는 곳에서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기를 삼갈 것이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타인 13— 사랑하는 사람, 부모나 배우자, 형제자매, 자식, 가까운 친구 — 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원시인의 예시를 든다. 원시인의 역사는 살인으로 얼룩져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는 본질적으로 민족들간에 벌어진 살인의 연속이다. 선사시대 이후 인류는 막연한 죄책감을 갖게 되었고, 일부 종교에서는 그 죄책감을 원죄의 교리로 농축시켰는데, 그 죄책감은 아마 원시인이 저지른 살인죄의 결과일 것이다. 14
전쟁은 죽음에 대한 이런 관습적 태도를 일소해 버린다. 죽음은 더이상 부인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의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정말로 죽고, 그것도 한 사람씩 죽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만 명씩 죽는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전쟁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부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전히 죽음은 우연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수많은 죽음이, 단기간안에 축적되는 그 자체의 특성상, 죽음은 우연성에서 탈피하게 된다. 우리가 당혹감과 혼란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능력 마비 상태에 빠진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는 모습은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프로이트는 서술한다. 15사랑하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신적 소유물, 즉 우리 자신의 자아를 이루는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타인이고, 심지어는 적이기까지 하다. 극소수의 상황을 빼고는 가장 다정하고 친밀한 애정 관계에도 약간의 적개심은 따라다니며, 이 적개심은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소망을 자극할 수 있다. <양가감정>에 따른 이런 갈등은 과거에는 영혼에 대한 교리와 윤리학을 만들어 냈지만, 이제는 신경증을 낳는다. 16
3.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
이 저작은, 개인 심리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토대로 집단 심리를 설명하고, 정신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해 프로이트 가진의 연구를 진전시키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개인 심리학과 사회심리학 또는 집단 심리학 사이에는 언뜻보아 중요한 차이가 있는 듯싶지만,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면 뚜렷한 차이가 거의 사라진다. [⋯] 개인의 정신생활에는 타인이 본보기나 대상이나 조력자나 적대자로 끼어들기 마련이다. 개인 심리학의 의미를 이렇게 확대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며, 따라서 개인 심리학은 처음부터 사회 심리학이기도 하다. 17
프로이트는 우선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에 대한 인용으로 시작한다. 프로이트는 르 봉이 말한 집단 심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르 봉은 집단 속의 개인들의 그들의 후천적인 특성 내지는 개성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종족적 무의식이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이 조직화된organized 집단에 속하는 그 순간, 야만인의 특성을 표출하며, 지적 능력의 하락을 보이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통적 속성 외에도, 집단 속 개인들은 새로운 특성들을 보인다. 그 이유를 르 봉은 세가지의 이유로 간추려 설명한다. 우선 집단 속 개인의 수가 많아지면, 집단의 익명성과 이로 말미암은 무책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에대해 프로이트는 집단 속의 개인은 무의식적 충동을 억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놓인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고 이야기하고, 18 이런 상황에서 양심이나 책임감이 사라지는 현상을 이해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19 20 고 덧붙이며 일단락 시킨다. 두번째로는 전염傳染성을 이야기한다. 집단 안에서는 전염이 일어나는데, 이는 마치 최면술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유 사하다. 그것의 존재는 확인되나 원인을 알기 어렵다. 집단 속에서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할 만큼 강한 감정과 행동의 전염성을 가진다. 이는 개인의 본성과 상반된다. 세번째 원인으로는 21피암시성被暗示性을 말한다.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홀림> 상태에 빠져 자신의 의식적인 개성과 의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암시에 복종하여 최면술사가 원하는 방향대로 지배하는 것처럼 심리학적 집단을 이루는 개인도 의지와 분별력, 자기 행동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다른 능력이 고도로 강화될 수 있다. 이런 결과로 “집단을 이루는 개인에게는 의식적인 개성 이 사라지고 무의식적인 개성이 우위를 차지하며 [...] 감정과 사고가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의지를 상실한 자동인형이 되어 버린다.” 프로이트는 르 봉이 집단 속의 개인이 실제로 최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이에 동의한다는 점을 밝힌다. 22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는 맥두걸William McDougall을 가져오며 <원시적 공감 반응에 따른 감정의 직접 감응의 원리Principle of direct induction of emotion by way of the primitive sympathetic response>에 대해 이야기하고, 윌프레드 트로터Wilfred Trotter의 의견 — 집단을 형성하는 경향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모든 고등 생물의 특성이 생물학적으로 연장된 것 23 — 들을 인용하며, 자신의 집단 심리학 이론에 정당성을 더한다.
이제 순수히 그 자신의 프로이트적 사유를 들여다보자. 신경증 연구에 큰 도움을 준 <리비도>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집단 심리학을 해명하도록 애써 볼 작정이다. 라고 이야기하며, 본격적으로 개진하기 시작한다. 리비도의 가장 기본적인 설명부터 시작하자면,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4리비도는 감정 이론에서 유래한 낱말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낱말 속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과 관련된 본능들의 에너지를 리비도라 부르는데, 그 에너지를 양적으로 방대한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현재로서는 그 양을 실제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여겨진다. 사랑이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은 물론 성적 결합을 목적으로 삼는 성애이다. (사람들이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고, 시인들이 노래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 — 어찌되었든 <사랑>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는 것 — 에는 성애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는 이런 다양한 사랑을 구별하지 않는다. [⋯] 남녀 관계에서는 이 본능이 성적 결합이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이 목적이 다른 목적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본능의 본래적 속성(예를 들면 사랑하는 대상에 접근하고자 하는 갈망이나 자기 희생같은 것)은 그 동일성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보존된다. 이러한 성적 결합 — 25<섹스>를 인간성에 굴욕과 창피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좀 더 점잖은 <에로스>나 <에로틱>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다. 26— 은 프로이트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가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집단은 분명히 모종의 힘으로 묶여 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결속시키는 에로스의 힘보다 더 훌륭하게 이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힘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개인이 집단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다른 구성원들의 암시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것은 개인이 다른 구성원들과 대립하기보다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 결국 개인은 <그들을 위해innen zu Liebe> 27 자선의 개성을 버리고 다른 구성원들의 암시에 영향을 받는다는 — 인상을 준다. 28
이 가설들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두개의 집단에 대한 분석을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와 군대이다. 수많은 공동체 중, 특히 이 두게의 집단을 상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가 없는 집단과 지도자가 있는 집단의 구별이다. 그리고 통상적인 관행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비교적 단순한 집단 형성을 출발점으로 선택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고도로 조직화한 인위적인 집단을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런 조직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와 군인들의 집단이다. 교회와 군대는 인위적인 집단이다. 다시 말해서 이 집단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 구조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억누르려면 어떤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29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똑같이 베푸는 우두머리 — 가톨릭 교회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군대의 경우에는 사령관 — 가 있다는 환상이 통용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모든 것은 이 환상에 달려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만민이 공평하게 사랑을 나누어 받는 다는 점, 즉 사랑의 신이기에, 만인이 평등하게 여겨지고, 이에 의해서 가족적 유사성이 강조된다. 30즉 그리스도가 베푸는 사랑을 통해 형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신자 개개인과 그리스도를 묶어 주는 관계가 신자들을 서로 묶어 주는 관계의 근원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1이는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사령관은, 마치 그리스도의 평등한 사랑처럼, 모든 병사를 똑같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이며, 그러한 점에 말미암아 그 병사들간의 유대감은 존속된다. 이러한 리비도적 결합, 내지는 리비도적 구조를 입증하는 증거로 프로이트는 <공황Panik>을 예시로 든다. 어떤 집단이 붕괴되면 공황이 일어난다. 공황의 특징은 상관의 어떤 명령에도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든 개인이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각자 자기 자신만 염려하는 것이다. 집단 구성월들을 서로 묶어 주는 상호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데 되고, 그러면 거대하고 무분별한 공포가 해방된다. 큰 위험이 닥치거나 감정적 유대 — 리비도 집중 — 이 사라지는 것은 개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된 이험이 증대되거나 집단을 결속시키는 감정적 유대가 소멸되면 공황이 일어난다. 그리고 감정적 유대가 사라지는 것은 신경증적 불안의 증세와 비슷하다. 교회 집단체의 경우 이러한 분괴의 예시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프로이트는 가이 손 32Guy Thorne의 『어두워졌을때 When it was Dark』라는 소설을 통해 설명한다. 종교 집단의 붕괴는, 군대의 공황처럼, 갑작스러운 공포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다만, 종교의 특성상 그 종교의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는데, 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종교 전쟁과 같은 편협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비슷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프로이트는 <동일시>라는 개념과 정애적, 관능적 사랑 33, 그리고 이것들을 종합한 한 도표에 대한 설명으로 자신의 과업을 진행한다. 동일시는 이전의 프로이트 사유에서, 특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남자아이는 아버지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아버지처럼 자라고 아버지처럼 되어,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대신하고 싶어한다. [⋯]그 태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 콤플렉스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또는 그보다 좀 나중에 남자아이는 애착유형에 따라 어머니에 대한 진정한 리비도 집중을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따라서 남자아이는 심리학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가지 결합을 보인다. 하나는 어머니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성적 리비도 집중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를 본보기로 삼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결합은 서로 영향을 주거나 간섭하지 않고, 한동안 나란히 공존한다. 그러나 정신생활을 통일을 향해 나아가기 마련이고, 그 결과 두가지 결합은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다. 정상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합류에서 생겨난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와 결합하려는 자신을 아버지가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아버지와의 동일시는 적대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어머니에 대해서도 아버지를 대신하고 싶은 원망과 이 동일시가 일치하게 된다. 사실 동일시는 처음부터 양가감정적이어서, 부드러운 애정 표현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제거하고 싶은 원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 동일시는 모범vorbild 으로 삼은 사람을 본받아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려고 애쓰는것이라는 것이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시작되는 동일시는 세가지의 경우가 있다. 도라의 사례를 통해 두가지의 사례를 알수있는데, 먼저 첫번째 경우는 34어머니를 대신하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시켜 주고, 이 욕망의 실현 — <너는 어머니가되고 싶어했는데, 이제 소원대로 ≪되었다≫. 어쨌든 너의 어머니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 에 대한 죄책감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앞서 경우와는 반대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동일시를 할 수 있다. 도라의 경우 아버지의 기침을 흉내냄으로써 두 번째 경우의 동일시를 한 것이다. 첫 번째 경우와 두 번째 경우를 통해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동일시 할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동일시 할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경우는 35자신을 똑같은 상황에 놓을 수 있는 능력이나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에 바탕을 둔 동일시의 메커니즘 이다. 프로이트는 이어서 36다른 자아와 상당한 유사성을 감지하면 이 점에서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이 동일시는 증세를 일으키는 상황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자아가 일으킨 증세로 전이된다. 따라서 동일시는 두 자아의 일치점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지만, 이 일치점은 계속 억압되어 있어야 한다. 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37집단의 경우 이 공통된 특성은 지도자와의 유대가 지닌 본질 속에 존재한다는 것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라고 한문장으로 정리한다. 또한 자아 이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38
자아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몹시 화를 내는 현상이다. 두 번째 부분은 자아가 대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변화한 부분이고, 따라서 잃어버린 대상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토록 가혹한 첫 번째 부분도 우리에게 낯선 존재는 아니다. 그것은 양심 — 자아 속의 비판적 작용 — 으로 이루어져있다. […] 전에 우리는 이런 가설을 도출한 적이 있다. 비판적 기능은 우리의 자아속에서 발달하며, 그 자아는 나머지와 분리되어 있다고. 우리는 그것을 <자아 이상 Ichideal>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자기 성찰과 도덕적 양심, 꿈을 검열하고 억압에서 주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아 이상의 기능으로 생각했다. (1921/2022 : p. 126)
또한 자아 이상에 대해서 위와 같이 설명한다. 그림을 통한 프로이트의 설명을 통해 이해해보자. 집단의 구성원들의 자아는 당연하게도 구분되어 있다. 따라서 그림에서도 자아는 3개의 점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한 자신의 양심이라고 표현된, 자기 비판적인 성격을 띄는 자아 이상도 각 자아마다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라 자아 이상은 잃어버린 대상을 포함하는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대상은 자아 이상의 반대, 대상에 있다. 원래는 당연하게도 자아와 자아 이상처럼 각각의 대상이 있지만, 목적이 금지된 성적충동, 순수 정애적인 요소, 리비도적 결합을 통해 외부의 대상 X로 그 대상들이 통일되었다. 프로이트가 동일시를 설명할 때 세 번째 경우에서 다른 자아와 상당한 유사성을 감지하면 이 점에서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이 동일 시는 증세를 일으키는 상황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자아가 일으킨 증세로 전이 된다. 따라서 동일시는 두 자아의 일치점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지만, 이 일치점은 계속 억압되어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즉 금지된 성적 충동이라는 리비도적 결합의 특성에 따라 외부의 대상 X, 지도자는 자아 입장에선 성적 충동이 억압되어 있고, 이 억압된 외부 대상 X라는 같은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유사성으로 인해 자아는 서로를 동일시하여, 구성원 서로도 마 찬가지로 리비도를 통해 결합할 수 있다. 또한 이 대상이 자아 이상을 대신한 것이다. 따라서 집단 속의 개인의 자아 희생은 당연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39
- (「나의 이력서」에 대한 후기 참조.) [본문으로]
- (1915/2022 : p.45.) [본문으로]
- (1921/2022 : p.46.) [본문으로]
- (1915/2022 : p.48.) [본문으로]
- 단, 반동과 승화는 다른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 (1915/2022 : p.50.) [본문으로]
- (1915/2022 : p.51.) [본문으로]
- (1915/2022 : p.51.) [본문으로]
- (1915/2022 : p.52.) [본문으로]
- (1915/2022 : p.53.) [본문으로]
- (1915/2022 : p.68.) [본문으로]
- 다만 그 예외가 소설이다. 우리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 주인공과 함께 죽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살아남아서 또 다른 주인공과 함께 다시 죽을 준비를 한다. (1915/2022 : p.60.) [본문으로]
- (1915/2022 : p.58.) [본문으로]
- (1915/2022 : p.62.) [본문으로]
- (1915/2022 : p.61.) [본문으로]
- (1915/2022 : p.71.) [본문으로]
- (1921/2022 : p.77.) [본문으로]
- (1921/2022 : p.83.) [본문으로]
- (1921/2022 : p.83.) [본문으로]
- 우리의 양심은 윤리교사들이 선언하는 것처럼 대쪽 같은 재판관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회적 불안>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사악한 정열에 대한 억제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잔학 행위와 기만, 배신과 야만적인 행위를 제멋대로 저지른다. (1915/2022 : p.46.) [본문으로]
- (2024 : p.2.) [본문으로]
- (2024 : p.5.) [본문으로]
- (1921/2022 : p.99.) [본문으로]
- (1921/2022 : p.103-104.) [본문으로]
- (1921/2022 : p.103.) [본문으로]
- (1921/2022 : p.104.) [본문으로]
- 이는 독일어 관용구이다. 이를 그대로 해석하면 '그들 사랑을 위해'라는 뜻이 된다. 바로 앞의 문단에서 프로이트는 에로스를 사랑 liebe 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는데, 이를 생각하면, 굉장히 '프로이트적' 관용구임을 느낄 수 있다. [본문으로]
- (1921/2022 : p.105.) [본문으로]
- (1921/2022 : p.106.) [본문으로]
- (1921/2022 : p.107.) [본문으로]
- (1921/2022 : p.107.) [본문으로]
- (1921/2022 : p.109.) [본문으로]
- 정애적 사랑과 관능적 사랑에 대한 설명은 이 각주를 통해 짧게 다뤄보고자 한다. 우리의 사랑은 관능적인 사랑은 우리의 원초적인 사랑의 모습, 어머니에 느끼는 사랑, 무의식속에 남아있는 사랑의 형태이고, 정애적 사랑은 목적 달성이 금지된 사랑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 (1921/2022 : p.119-121.) [본문으로]
- (1921/2022 : p.121-122.) [본문으로]
- (1921/2022 : p.122-123.) [본문으로]
- (1921/2022 : p.123.) [본문으로]
- (1921/2022 : p.123.) [본문으로]
- (1921/2022 : p.123.) [본문으로]